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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퀴벌레

JongHoe 2021. 1. 4. 20:08

Photo by Markus Winkler on Unsplash

 

그날의 기억은 내가 막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그곳이 어디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는 좁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복도라기보다는 베란다 혹은 난간이라고 해야 하나? 건물의 안쪽도 아니고 바깥쪽도 아닌 길쭉한 길이다. 건물 외벽에 가벽으로 만든 창고 같은 길, 복도. 내 앞에 누군가 달리고 있었고 나는 그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추격자처럼 내가 잡으러 가는 인상은 아니었고, 나도 저 사람처럼 빨리 여기를 지나가야 한다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도망을 치고 있었던 걸까?

 

그 집의 전체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낡고 또 허름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도시의 변두리, 산동네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나 연립주택 같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지고 노인네 피부처럼 태양에 오래 노출되어 갈라진 자잘한 주름이 가득하다. 여기저기 빈 페트병이 널부러져 있고 김치 냉장고에 들어 있을법한 김치 보관함 같은 큰 플라스틱 박스가 몇개 쌓여있다. 쓸모 있는 물건이 담겨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비어 있거나,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방치된 이상한 물질이 들어있다. 먹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달리기를 하고 있지만, 기록 갱신 같은 빠른 달리기는 아니다. 빠른 걸음보다는 좀 더 빠른, 달리기보다는 좀 느린, 걷기와 달리기의 중간 상태다. 모르는 길이고 처음 달려보는 길에서 이 정도 속도라면 달리기라고 보아도 될 만큼 빠르다. 자주 다니던 길이라면 좀 느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 길을 내게 익숙한 길인가? 생각으로는 처음 보는 길인데, 몸에서 느끼는 반응은 익숙한 곳이다. 이 곳에 왔던 적이 있었나? 이사 다녔던 많은 곳 중 하나인가? 예전에 살던 곳인가? 기시감이 있지만 아는 곳은 아니다.

 

앞서 가는 사내가 옆 건물로 뛰었다. 대랸 1.5~2미터 정도 되어 보인다. 도움닫기를 해서 뛰면 건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멈칫, 달리기를 멈추었다. 본능적으로 건널 수 없다고 느낀다. 한 명은 건너가 있고, 나는 아직 건너지 못했다. 건너야 한다는 걸 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건너편 사내는 기다리는 건지, 가버린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서 건너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낀다. 건너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나도 건너고 싶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달려간다. 하지만 뛰어야 할 곳에서 멈춘다. 아래쪽을 내려다 본다. 여기는 2층 이상이구나. 얼마나 높은 곳인지는 모르겠다. 끝까지 보진 못했지만 2층보다 높은 곳이라는 것은 알겠다. 어디서 디딤발을 놓고 뛰어야 할지 가늠한다. 여기서 저기까지, 멀지 않다, 건널 수 있다.

 

점프를 해야 할 곳, 디딤발을 놓을 위치가 허술하다. 앞 사람이 점프하면서 부서진 것일까. 시멘트가 부서져 흙이 삐져 나오고 금이 갔다. 비에 젖고 직사광선에 노출되어 오랜 기간 수축된 나무가 시멘트 끝에 경계를 이루고 있다. 손으로 누르는 정도로 부서지진 않겠지만, 발을 딛고 점프 하기에는 약해 보인다. 못질되어 있는 부분의 녹이 흘러 생긴 얼룩이 깊다. 하루 이틀 된 허술함이 아니다.

 

천장을 쳐다본다. 한 층 위에서 건너면 가능할까. 옆으로 점프해서 건너진 못하더라도 아래쪽으로 뛰어내리면 가능성이 있다.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왜 뛰어야 하는지, 왜 건너가야 하는지 아직 모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 누가 쫒아 오는 것도 아닌데 쫓기는 기분이 든다.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건너편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나 혼자다. 먼저 건너간 사람은 어디에 있지? 쫓기는 기분이 든다. 왜 건너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건너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지붕 위로 올라기기 위해 왔던 길로 돌아간다. 지붕은 아크릴 같은 플라스틱 재질로 보인다. 유리인가? 유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저분하다. 하긴 이 건물에서 깨끗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쓰레기장 같이 더러운 것은 아니다. 깨끗하지 않지만 더럽지도 않다. 좀 지저분하긴 해도 못 살겠다고 놀랄 정도는 아니다. 아크릴인지 유리인지 모를 지붕 위로 올라가기 위해 베란다 난간 쪽으로 발을 올렸다. 손을 뻗어 위로 올라갈 자리를 탐색한다.

 

건물 안쪽 방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보인다. 어른은 난닝구에 파자마를 입었다. 어린 아들은 외출에서 돌아온 복장인지 아버지보다는 차려입었다.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둘 다 양말은 신지 않았다. 아들은 먼지떨이인지 빗자루인지를 들었고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는 갑 티슈를 들었다. 뭔가를 찾고 있는지 두리번거리고 있다. 잠깐 쳐다보다 나는 지붕으로 올라기기 위해 난간에 올라서 손을 뻗는다. 지붕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상체를 걸쳐 놓았을 때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친다. 여자 아이가 밖을 내다보다 눈이 마주친 것이다.

 

아아악! 여자 아이가 소리를 지른다. 나도 놀랐는데 여자 아이도 놀랐나 보다. 아악 악 아아악. 사람들이 모여들 때까지 소리를 지를 모양이다. 나는 저렇게 까지 놀랄 일인가 싶다가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가 보다 한다. 하긴 나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다. 여자 아이 비명 소리 때문에 그러는 건지, 이 상황에 놀라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 뛰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 보았던 아버지가 오는 것일 거다. 비명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커질수록 내 심장이 뛰는 소리도 커진다.

 

두 사람이 다가오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몰래 훔쳐보려던 것이 아니라고, 거기 딸이 있는줄도 몰랐다고, 그저 저기를 건너가려고 했다고 말하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좋든 싫든 이제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아크릴 지붕이 부서지든, 잡혀서 곤란해지든, 어느 쪽이든 결론이 날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뛰어 보기로 결심한다.

 

아크릴 지붕 위를 달린다. 먼지가 쌓이고 빗물과 이슬에 젖고 또 마르면서 굳어진 얼룩이 녹색 아크릴을 두껍게 만들었나, 빛 바랜 아크릴은 내 체중을 견딜 수 있으려나, 걱정을 하며 아크릴 지붕의 격자무늬 프레임을 밟고 뛰려고 집중한다. 아크릴 보다는 샤시로 된 부분이 튼튼할 것이다. 뒤쪽으로 아이 아버지가 나타났다. 곽 티슈가 통째로 날아왔지만 나를 맞히진 못했다. 점프, 마지막 프레임을 밟고 뛴다. 샤시 넓은 부분을 밟으려고 했지만 곽티슈가 날아오는 바람에 디딤발을 제대로 놓지 못했다.

 

뛰기는 뛰었지만 디딤발 때문에 힘이 빠졌다. 아크릴 지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끝에 섰다. 두 손을 뻗어 온 몸을 쭉 편 상태로 넘어졌다. 여자 아이가 기겁을 한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이 비명소리가 높고 길다. 가만, 나는 옷을 입고 있나?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된다. 내가 여기에 왜 있지? 왜 도망가고 있지? 아이 아버지가 지붕 위로 올라왔다. 생각할 틈이 없다. 아크릴 지붕 끝에 서서 건너편으로 뛰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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