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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 납셨네 본문

소설

호구 납셨네

JongHoe 2021. 10. 2. 11:24

여수, 2021

동해 바닷가의 작은 낚시점 '동해 낚시 슈퍼' 박사장은 창 밖을 내다보며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었다. 오늘도 공치는 날인가 한숨을 내쉬며 담배 생각을 했다. 하긴 일요일 오후에는 손님이 없지.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일어나기도 귀찮았다.

 

넓은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이 넓게 퍼졌다. 비가 올 구름은 아니고 희고 밝은 구름이 뭉게뭉게 넓게 퍼져있다. 낚시하기 좋은 날씬데, 저런 구름이면 햇살이 따갑지도 않지. 방파제에 오래 서 있어도 덥지 않을 터였다. 선풍기는 천천히 회전하며 느릿느릿 가게 안 여기저기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일까 말까 하는 중에 가게 앞에 흰색 지프차가 섰다. 요란한 장식은 없었지만 커다란 타이어와 높은 차체 그 자체가 나 놀러 왔소 하는 느낌을 주는 차다. 크고 작은 사내들이 서넛 차에서 내린다. 반바지를 입은 사람, 꼬불꼬불 긴 파마머리를 한 사람, 배가 볼록 나온 사람, 호리호리 얇은 사람, 차에서 내려 가게 쪽으로 걸어왔다. 길을 물어보려는 폼은 아닌 것 같다. 손님인가.

 

"아 사장님, 미끼 있나요?"

"있지요, 그럼요"

"찌낚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인데, 원투 낚시도 할까 싶고, 채비하는 거 하고 미끼 하고 포인트도 좀 알려주세요"

 

무리 중에 그래도 경험이 있는 사람인지, 반바지를 입은 사람이 나서서 묻는다. 호리호리한 사람은 초보가 아니라는 듯 혹은 우린 만만하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듯 살짝 굳은 표정이다. 파마머리는 그저 신나는지 싱글벙글, 배불뚝이는 낚시에 별로 관심이 없는 눈치다.

 

"낚시는 원투보다 찌낚시가 재밌죠, 채비는 준비해 오셨어요? 가지고 온 낚싯대 보여주세요, 내가 채비까지 차근차근 알려 줄 테니 가져와 보세요"

 

그다지 낚시를 즐기는 사람 같지는 않고. 어떤 것들을 가져왔는지 보면 알겠지. 반바지가 지프에서 바리바리 짐을 꺼내고 호리호리가 보조해서 짐을 가져온다. 호리호리가 반바지의 부하구나. 권력관계를 대충 알겠다. 파마머리 하는 폼을 보니 반바지가 파마머리를 데리고 왔네. 배불뚝이는 파마머리 친구이거나 반바지 친구 같은데 확실치 않다.

 

"저는 찌낚시를 해보고 싶은데 아직 낚아 보진 못했어요"라며 반바지가 장비를 꺼낸다.

"낚싯대 한번 볼까요?"

 

갯바위에 적합한 찌낚시용 1-530 낚싯대가 2개 나왔다.

 

"아유 이거 제대로 장만하셨네"

박사장은 일단 칭찬으로 시작한다.

 

"이 정도면 참 좋은 낚싯대예요. 갯바위에서 돔 낚시하기도 좋고, 방파제에서 고등어 같은 거 잡기도 좋아요. 요즘에는 간편하게 루어대로도 많이 해요."

"안 그래도 원투대하고 루어대도 가져왔어요. 저 두 분은 원투로 할까 싶은데..."

"원투 보다 찌낚시가 제대로지요. 한번 던져보세요. 요즘은 루어대로도 찌낚시하니까"

"제가 가진 릴에는 플로아팅 줄은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합사줄인데 괜찮을까요?"

 

반바지가 생각보다 낚시 경력이 있는 것 같다. 

 

"플로아팅 줄 구분도 할 줄 아시고, 낚시 많이 해보셨나 보네"

 

칭찬을 하자 반바지보다 호리호리가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초보대접을 해서는 안 되겠다.

 

"찌낚시는 플로아팅 줄 써야죠. 저렴한 릴도 많으니 플로아팅 줄로 채비해드릴까요?"

"그럼 제가 가진 릴에 플로아팅 줄 하나 감고... 루어대는 얼마나 하죠? 새 걸로 한 세트 맞춰 주세요."

 

역시. 반바지가 한턱 쏘는구나.

 

"그럼 차근차근 해볼까요. 가지고 있는 채비 보여주세요. 어떤 채비인지 보고 같은 것으로 맞춰 드릴게요."

 

반바지가 꺼낸 채비는 한두 해 전에 유행하던 채비다. 초보자가 하기에는 좀 어려운데. 역시 경력이 있는 사람인가.

 

"채비를 보니, 낚시 초보가 아니신 거 같은데, 낚시한 지 좀 되신 분이시죠?"

"아유 아니에요, 초보예요"

 

반바지가 부끄러워하는데 알아 봐주니 좋아한다. 호리호리도 '역시 우리 형님' 하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나는 칭찬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 라고 선포라도 하는 듯 거부의 몸짓으로 무표정하게 팔짱을 꼈다. 반바지는 "제가 가진 릴이 이거예요" 하며 릴을 서너 개 꺼낸다. 박사장은 엄지를 척 세우며 "오오 훌륭한데요"라고 속삭이듯 말하니 반바지가 뿌듯해하며 부끄러워하고 호리호리, 파마머리, 배불뚝이는 호오오오 하며 놀란다. 적당한 칭찬, 감탄하는 표정과 감탄사를 살짝, 짧게, 과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다면 누구든 호구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 됐다, 이런 사람들에겐 많이 팔 수 있겠다.

 

"자, 네 분 모두 찌낚시로 세팅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준비하구요, 저거 한번 줘 보세요, 아니 그 옆에, 그렇죠, 아유 잘 찾네, 맞아요, 그거 주세요, 이렇게 저렇게 세팅하고, 감고, 맞추고, 끼우고, 왔다 갔다, 이러쿵저러쿵하며 낚싯대 4개를 맞췄다.

 

루어대 1개, 릴 2개, 플로아팅 낚시 줄 3개, 목줄 1개, 막대찌 4세트, 바늘 걸이, 바늘 1 봉지를 팔았다. 30만 원 좀 넘게 나왔다. 반바지가 결제를 살짝 망설이자 파마머리가 결제했다.

 

파마머리가 "내가 하고 싶다고 데려 왔는데 내가 사야지"라고 말하자 반바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이 밝아진다.

 

"미끼도 있어야죠?"

 

박사장은 미끼용 크릴새우 2 덩이, 미끼용 파우더 1 봉지를 미끼통에 섞어 주었다. 모두 낚시대에 정신이 팔려 있어 제일 뒤에 서 있던 배불뚝이가 현금으로 결제했다.

 

행복한 표정의 사내들은 희망에 부푼 가슴으로 가게를 나선다. 박사장은 오늘 가게 문 열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일요일이라고 집에 있으면 뭐하나, 바가지나 긁히지. 기분 좋게 담배를 꺼내 물고 오늘 밥값은 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반바지가 급하게 들어왔다. 정말 고기를 잡을 작정이었는지 돌아와 회칼을 사갔다.

 

"많이들 잡으세요오"

 

호구들을 보내며 박사장은 후우욱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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