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설 (5)
생각 관찰
애들 아비는 아직인갑네. 옆집 할매가 문앞을 지나다 묻는다. 야, 오늘도 늦는갑슴니더. 그래. 고구마 좀 삶았는데 애들 주든가. 고맙심더. 고구마를 받아드는데 애들이 쪼르르 나타나 받아간다. 아이고 자들은 버릇도 없이... 뛰지 말고 천천히 무라. 할무니 잘 묵겠심미더. 할매는 손을 휘이 저으며 벌써 저만큼 걸어간다. 애들 아비는 또 늦는다. 지만 힘든가. 집이 싫은가. 마지 못해 사나. 집에 있으면 한숨만 쉬다가, 나가면 늦게 들어온다. 그래도 집에 있는 것 보다야 술을 마시고 방황하더라도 나가서 뭐라도 하는 게 낫다. 사람들 만나다보믄 뭐라도 일이 안 생기겠나. 잘 다니던 회사는 왜 그만두었나.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그만 두었으면 다시 시작해야지 왜 노나. 말도 없이 지 혼자 결정하고 또 지 혼자..
날이 따뜻해지다 못해 살짝 더워지기까지 했으니 옷을 하나 사야겠다. 해져서 구멍이 날 정도로 새 옷을 잘 사지 않는 편이긴 한데, 뭐 돈 좀 아껴보겠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옷 사러 가는 것 자체에 부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옷 사는 것을 썩 즐거워하지 않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점원이 옆에서 이것저것 도와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거울 속 내 모습에서 기성복이 맞지 않는 걸 확인하기도 싫고, 밝은 조명 아래에서 땀을 흘리는 것도 초라하게 느껴져서 싫다. 과한 존댓말은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나를 판단력 없는 꼬마를 대하는 느낌이어서 좀 불편하다. 어차피 고객의 의견이나 상태와 상관없이 무조건 어울린다고 말하는 점원의 말도 성가시다. 그냥 인터넷으로 사서 살짝 크거나 작더라도 대충 맞으면..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J 씨는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12시가 되기 전에 1000글자, 원고지 5매를 써내야 네 식구 하루치 분량의 식량을 배급받을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J 씨는 편하게 글쓰기를 마친 적이 없다. 겨우겨우 원고를 채우고 하루치 분량의 식량을 배급받는다. 어떤 날은 원고를 쓰지 못해 배급을 받지 못한 날도 있다. J 씨의 집에서는 미리미리 원고를 써놓으면 안 되냐고 묻는 일이 잦았다. J 씨는 미리 쓰기 싫어서 안 쓰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대화는 늘 부부싸움으로 이어진다. 목소리가 커지고 험악한 분위기에 막둥이가 울고, 애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J 씨가 "집안 꼴 조오타" 큰소리치면서 화장지 같은 깨지지 않은 물건을 집어던진다. 요란하게 우당탕 책꽂이에 쌓아 ..
동해 바닷가의 작은 낚시점 '동해 낚시 슈퍼' 박사장은 창 밖을 내다보며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었다. 오늘도 공치는 날인가 한숨을 내쉬며 담배 생각을 했다. 하긴 일요일 오후에는 손님이 없지.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일어나기도 귀찮았다. 넓은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이 넓게 퍼졌다. 비가 올 구름은 아니고 희고 밝은 구름이 뭉게뭉게 넓게 퍼져있다. 낚시하기 좋은 날씬데, 저런 구름이면 햇살이 따갑지도 않지. 방파제에 오래 서 있어도 덥지 않을 터였다. 선풍기는 천천히 회전하며 느릿느릿 가게 안 여기저기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일까 말까 하는 중에 가게 앞에 흰색 지프차가 섰다. 요란한 장식은 없었지만 커다란 타이어와 높은 차체 그 자체가 나 놀러 왔소 하는 느낌을 주는 차..
그날의 기억은 내가 막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그곳이 어디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는 좁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복도라기보다는 베란다 혹은 난간이라고 해야 하나? 건물의 안쪽도 아니고 바깥쪽도 아닌 길쭉한 길이다. 건물 외벽에 가벽으로 만든 창고 같은 길, 복도. 내 앞에 누군가 달리고 있었고 나는 그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추격자처럼 내가 잡으러 가는 인상은 아니었고, 나도 저 사람처럼 빨리 여기를 지나가야 한다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도망을 치고 있었던 걸까? 그 집의 전체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낡고 또 허름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도시의 변두리, 산동네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나 연립주택 같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지고 노인네 피부처럼 태양에 오래 노출되어 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