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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의 무게 본문

소설

가장의 무게

JongHoe 2021. 12. 17. 20:49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J 씨는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12시가 되기 전에 1000글자, 원고지 5매를 써내야 네 식구 하루치 분량의 식량을 배급받을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J 씨는 편하게 글쓰기를 마친 적이 없다. 겨우겨우 원고를 채우고 하루치 분량의 식량을 배급받는다. 어떤 날은 원고를 쓰지 못해 배급을 받지 못한 날도 있다.

 

J 씨의 집에서는 미리미리 원고를 써놓으면 안 되냐고 묻는 일이 잦았다. J 씨는 미리 쓰기 싫어서 안 쓰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대화는 늘 부부싸움으로 이어진다. 목소리가 커지고 험악한 분위기에 막둥이가 울고, 애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J 씨가

 

"집안 꼴 조오타"

 

큰소리치면서 화장지 같은 깨지지 않은 물건을 집어던진다. 요란하게 우당탕 책꽂이에 쌓아 두었던 잡동사니가 넘어지고, 큰애가 겁에 질린 막둥이를 데리고 나가는 동안 애엄마가

 

"아이고 내가 이런 대접 받을라꼬 시집을 왔능가 내싸 마 이렇게는 못살겠다 서방 복도 없는 년이 무슨 덕을 볼라꼬 세상을 더 살까, 팍 죽어버려야 할랑갑따, 아이고 몬살겠다 내사 마 이래는 못살겠다"

 

라면서 통곡을 하고, J 씨는

 

"집구석이 이 모양이니 내가 어째 원고를 쓰겠나"

 

방문을 박차고 나가면 싸움이 끝난다.

 

J 씨는 담배를 물고 동네 슈퍼 테이블에 앉아 소주를 마신다. 슈퍼 박사장은

 

"밀린 외상값을 갚아 가면서 또 외상을 해야지... 갚지도 않으면서 맨날 외상을 해대니 인자는 외상도 못 주겠소."

 

라고 J 씨에게 말한다기 보다, 가게 안을 향해 소리친다. 그리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J 씨와 같이 홀짝홀짝 소주를 마신다.

그러면 박사장 부인이 나타나

 

"그만 좀 묵으소, 술을 파는 긴지, 장사를 하는 긴지,

팔라꼬 만들어 놓은 걸 지가 다 처묵고 있으니, 그래 갖고 장사 자알 되겠다"

 

라고 못마땅한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도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주는데 가끔 기분이 좋은 날은 계란 프라이도 만들어 주었다.

 

전봇대 백열등이 주황색 불빛을 밝히며 골목길을 비추고, 골목길 어디에선가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멀리서 애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밤이 또 반복되고 있다. 큰애가 막둥이 손을 잡고 슈퍼 근처를 배회하면 J 씨는 무뚝뚝하게

 

"어서 들어가 자라"

 

라고 말한다. 박사장은

 

"배고프제? 빵이라도 하나 먹을래?"

 

하고 빵을 쥐어주면 J 씨는

 

"잘 밤에 무슨 빵이고"

 

타박을 한다. 큰 애와 막둥이가 빵을 하나씩 받아 들고 헤벌쭉 웃으며 집으로 걸어 가면 J 씨와 박사장은 애들을 보며

 

"애들이 무슨 잘못이고, 부모 잘못 만난 죄 밖에 더 있나"

 

하면서 또 한 잔 털어 넣는다.

 

J 씨는 약간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대책도 없이 세상에 내놓은 애들에게 미안했고 그러면서 나는 뭐 할라고 이 세상에 나왔나,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한다. 박사장은 그저 소주 마시는 것이 좋은지 밤늦게 집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좋은지 싱글벙글 즐거운 표정이다.

 

원고 마감은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 글쓰기가 왜 이렇게 어렵나. J 씨는 다시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한숨을 쉰다. 테이블에 빈 소주병과 김치 국물만 남아있는 그릇을 두고 일어선다. 박사장도 일어선다. 내일은 일찌감치 원고 마감하고 편하게 한 잔 하자고. 그려 그려 그러자고. J 씨는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휘청휘청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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