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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빠의 쇼핑 본문

소설

금사빠의 쇼핑

JongHoe 2022. 5. 11. 16:08

날이 따뜻해지다 못해 살짝 더워지기까지 했으니 옷을 하나 사야겠다. 해져서 구멍이 날 정도로 새 옷을 잘 사지 않는 편이긴 한데, 뭐 돈 좀 아껴보겠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옷 사러 가는 것 자체에 부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옷 사는 것을 썩 즐거워하지 않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점원이 옆에서 이것저것 도와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거울 속 내 모습에서 기성복이 맞지 않는 걸 확인하기도 싫고, 밝은 조명 아래에서 땀을 흘리는 것도 초라하게 느껴져서 싫다. 과한 존댓말은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나를 판단력 없는 꼬마를 대하는 느낌이어서 좀 불편하다. 어차피 고객의 의견이나 상태와 상관없이 무조건 어울린다고 말하는 점원의 말도 성가시다.

 

그냥 인터넷으로 사서 살짝 크거나 작더라도 대충 맞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옷들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무난한 것들이 많다. 무채색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옷들이다. 외출복이라 할만한 것들은 없고, 대체로 작업복에 가깝다. 외출복이라기엔 초라하고 작업복이라 하기엔 좀 아까운, 까맣고 검은 옷들, 진곤색이거나 짙은 회색이거나, 그 뭐라더라... 차콜, 그렇지 숯 색깔. 대체로 그런 색깔 옷들이다. 그나마 색깔이 좀 있다는 게 청바지 정도인가.

 

지난겨울에는 뭔 바람이 불었는지 나무색 헤링본 무늬가 자잘하게 들어간 재킷을 샀다. 나이 들어서 너무 애처럼 입고 다니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다고,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꼭 정장이 아니더라도 나이에 걸맞게 조금 더 갖춰 입을 필요는 있지 않겠냐고, 너무 아저씨처럼, 동네 슈퍼에 물건 사러 나온 사람처럼 입고 다니지는 말라는 얘기도 들었다. 뭐 그런 말이야 가볍게 흘려버려도 되고, 지가 무슨 상관이람 하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뭐 재킷 하나 산다고 크게 바뀌기야 하겠냐만.

 

백화점에서, 점원이 거들어 주는 상태에서, 옷을 몇 개나 갈아입으면서 샀다. 내가 변했다기보다 그 점원이 워낙 솜씨가 좋았다. 남성복 매장이었으니 아마 나 같은 손님을 많이 다뤄보았겠지. 무관심한 듯 관심을 가지고, 거들지 않는 듯하면서 세세하게 챙겨주고, 선택의 순간에 확신을 가지도록 하는 한 마디를 툭 건넨다. 살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에선 부추기지 않지만 결국은 사는 쪽으로 이끈다. 스타일이 좋다거나 이런 색이 어울린다 하는 느낌의 말을 아부하는 느낌이 들지 않게, 마치 심사위원이 냉정하게 판단한다는 느낌으로,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는 느낌으로 의견을 준다. 나를 평소에 패션에 관심이 있어 왔던 사람으로, 그렇지만 표현은 과감하게 하지 않았던, 내면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대한다. 젊은 취향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추켜 세워준다. 그래, 사실은 나 멋있는 사람이었어. 그때 나는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을 진심으로 들었던 거다.

 

오늘은 다시 그 집에 옷을 사러 간다. 이번엔 여름에 입을 재킷이다. 여전히 잘 가지 않는 백화점이지만 그 옷집에 가기 위해 간다. 나를 패션을 아는 사람으로 알아봐 준 그 집으로 가는 것이다. 여성복 매장을 지나 남성복 매장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올라가 코너를 돌고 가운데 넓게 차지한 매장들을 지나 끝에 있는 작은 가게로 간다. 남성복 매장의 전문가께서 나를 맞이한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칭찬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나는 어느새 패션에 관심이 많고 젊은 느낌이 어울리는 뭔가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 그녀 앞에 선다. 그리고 나는 여유 있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중년 남자로 깨어났다. 8개월 정도만에 처음 왔으면서, 매주 매달 이런 정도의 쇼핑은 하는 사람인양 옷을 둘러보고 추천해주는 옷을 입어본다. 볼록 나온 배도, 짧은 팔도, 좁은 어깨도, 매장에 있는 신비의 거울 앞에선 괜찮은 비율로 보인다.

 

"지난번에는 사진 찍어서 사모님께 보내더니 이번에는 안 보내세요?"

 

그때는 옷 스타일 좀 바꿔보라고 말했던 후배에게 어떠냐고 물어보느라 보낸 것이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나 보다.

 

"네, 옷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냥 잘 샀다고 그러던데요."

"아아, 사모님이 터프한 편이시구나"

 

아 사실은 부인이 아니라 아는 동생인데, 여자 친구도 아니고, 그냥 패션을 잘 아는... 뭐... 아니, 이런 생각을 왜 하고 있지? 굳이 이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지, 나는 그냥 빙긋 웃고 만다.

 

옷이 잘 어울린다, 스타일이 좋다, 캐주얼하게 입으면서 점잖은 스타일 내기 어려운데 잘 어울린다, 인상이 좋다, 표정이 좋다, 미소가 잘 어울린다 등등 듣기 좋은 말을 계속한다. 재킷을 입어 보라고 옷을 펼쳐 들어주는 행동조차 부담스러워 어색하게 옷을 입지만,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불편하고 익숙해지지도 않지만, 나는 듣기 좋은 말에 현혹되고 신비의 거울에 취하고, 나를 떠받드는 분위기에 빠져든다.

 

연예인이 팬들을 대하는 기분으로, 익명의 다수에게 둘러싸여 미소를 띠고 약간은 귀찮다는 듯이 또 이런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하면서 피곤한 표정으로, 팬들에게 네 고마워요 감사해요 하는 느낌으로, 그녀의 칭찬에 대답한다. 가만, 부인이 있는지, 결혼을 했는지, 여자 친구가 있는지 떠보려고 물어보는 질문이었나? 날 좋아하나? 부인이 있어서 아깝다고 생각하는 건가?

 

금사빠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냥 빠져드는 것이다. 어쩐지 날 보는 눈빛이 아련하더라, 나한테 눈을 못 떼는구먼. 아, 그래도 거만하게 굴면 안 되지, 겸손해야지, 친절해야지라고 또 자신을 다독인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분에게 어찌 소홀히 대하겠는가.

 

모처럼 찾아온 따뜻한 애정의 눈빛에 마음이 열린다. 그녀를 다시 본다. 거울에 반사된 옆모습을 흘깃 쳐다 보고,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또 한 번 쳐다본다. 칭찬의 말을 들을 때 눈이 마주친다. 예쁜 사람이다. 매일 아침 이 사람이 꺼내 주는 옷을 입는 상상을 하고, 이 사람이 차려주는 식탁을 상상하고, 찻집에서 영화관에서 공원에서 데이트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보다도 빨리, 시간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빠른 시간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의 미래를 본다. 은은한 미소가 내 얼굴에 퍼져 나간다. 행복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진다.

 

그리고 행복감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너는 그저 호구일 뿐이야. 다루기 쉬운 고객이라고, 조금만 치켜세워주면 되는 쉬운 사람이라고, 그러니 까불지 말라고 말한다. 알아, 안다고, 그래도 좀 즐기면 안 되냐. 저분은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손님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것이란 걸 알고 있다고. 하지만 행복한 기분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고, 그 속에 더 머무르고 싶다고, 그 느낌을 더 누리고 싶다고, 그러니 좀 내버려 두라고.

 

백화점이 제공하는 기본 무료 주차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있는 동안 쇼핑이 끝났다. 꽤 꼼꼼하게 살펴보고 냉정하게 판단한 것 같은데, 만만한 호구가 아니라 깐깐한 소비자라고 생각했는데, 시간만큼은 알뜰하게 쓴 것일까? 아무렴, 나는 돈 보다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긴 하지. 도도하게 이런 정도의 지출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듯이, 백화점이 어색한 곳이 아니라는 듯이 꼿꼿하게 느릿느릿 천천히 주변 매장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동안 카드 결제 내역을 문자로 보면서 현실로 돌아온다. 생각보다 금액이 많이 나왔네, 이번 달 카드 한도를 걱정하고, 통장 잔액을 떠올린다.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사랑이 지나갔다. 매일 사랑에 빠지고 또 빠져나오는 금사빠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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