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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JongHoe 2022. 7. 17. 14:08

퇴사.

회사를 그만두었다.

 

언젠가 운전하다가 길가에 버려진 찬장을 보았다. 싱크대 상부장 말고 그냥 옛날 부엌에 쓰던 찬장. 수확이 끝난 빈 밭에 버려진 찬장은 시골 한적한 마을에 뜬금없이 서 있는 아파트 같았다. 찬장 2층에는 토끼가 두어 마리 들어 있었는데, 찬장의 한쪽에는 그물망이 쳐져 있고 한쪽은 뚫려 있어서 토끼들이 빠져나올 수 있는 구조였다.

 

누군가 가끔씩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지 찬장 안에 물그릇과 배춧잎이 있었다. 토끼들에겐 바깥세상보다 안전한 곳일까. 산짐승으로부터 보호가 되는 것일까. 토끼가 뛰어내릴 수도 있을 텐데, 산으로 가서 먹이를 구할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한 번 뛰어나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높이다. 토끼들은 부족한 먹이라도 안전하게 머무르는 것을 택한 것일까.

 

운전 중이라 자세히 보지도 못했고, 그곳이 어디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는지, 차 뒷자리에 앉아 넋 놓고 창밖을 보다가 본 것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저 그런 기억만 남아있다. 빈 밭에 있는 찬장과 토끼.

 

기억은 흐릿하지만 인상은 강렬해서 가끔 내가 그 찬장 안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토끼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의 직업에서 직을 떼어 냈다. 다른 토끼와 구분되는 나의 찬장에서 뛰어내린 거다. 찬장 토끼라고 말하면 동네에선 다 아는 그런 찬장, 안락하진 않아도 굶어 죽진 않을 수 있는 찬장이었다. 나를 소개하는 강력한 문장 하나를 이제 쓸 수 없다. 내가 숨기 좋았던, 나를 포장하기 좋았던 가림막을 치운다. 언제 어떤 위험이 다가올지 모르지만, 넓은 곳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먹이를 구하면서 살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찬장에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한다. 술잔이 비어야 채워진다는 뻔한 말, 혹시 안 채워질까 걱정하며 조금 남겨 놓지 않고 그냥 툭 털어 비웠다.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재미있게, 하고 싶은 거 하고, 내 맘대로 살자, 뭐 그런 뻔한 생각. 그래도 돈이 필요할 텐데, 생계를 위해 보장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존본능은 걱정을 만든다. 대접받으려 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편하게 살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 일 안 하고 꼬박꼬박 쌓이는 돈을 바라지 않으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기력하지 않으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위치를 욕심내지 않으면, 내게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살아지겠지.

 

3년을 더 다니면 명예퇴직을 신청할 수 있고, 명퇴하면 퇴직금 외에 1억여 원의 목돈을 더 받을 수 있었다. 3년이면, 17년을 다녔는데 3년쯤이야라고 생각하면 쉬울 3년, 5년만 잘 보내보자고 생각하고 2년이 지났는데 또 3년 보낼 생각 하니 너무 길게 느껴지는 3년. 내 인생의 3년, 50대의 3년, 내 여생의 3년, 그 3년... 그래 내가 사자, 1억에 3년을 사자, 50대의 3년을 내가 1억에 산다. 그런 계산을 했다.

 

카드값은 메꿀 수 있을까, 연체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회사 뒤에 숨고 싶은 생존본능, 안정 욕구, 나에 대한 의심, 비판이 있었다. 평생 나를 괴롭혀온 문제 중 하나였던 자격에 관한 문제. 내가 해도 되나, 니가 뭔데 그걸 하냐, 내가 뭐라고, 내 까짓 게, 뭐 그런 문제가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지적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묻고 따졌던 그런 문제. 문제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 그렇지만 내 고민의 근간에 있었던 문제, 콤플렉스,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드러낼 수 있으면 사라진다. 더 좋은 직을 얻어 열등감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잘못 설정된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치워버리는 거다. 더 좋은 직을 얻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을 문제, 더 큰 욕심을 계속 만들어 낼 자격에 관한 문제를 끝내는 거다.

 

직을 떼어내고, 나를 포장하는 포장지를 벗기고, 나약하고 초라한 것을 드러낸다. 그래도 죽지 않네, 살아 있네, 부끄럽지 않네, 문제없네, 이걸 왜 무서워했지? 하긴, 안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을 거다. 더 본질적인, 본능적인 두려움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 자격을 증명하는, 명사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자격을 증명해야 할 증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을 거다. 어떤 일이 주어지면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지 않는다. 할만하니까 시키겠지. 나를 믿고 시키는데 내가 왜 의심하나. 반대로, 또 다른 어떤 일을 하려는데 나에게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그건 내 일이 아닌 거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도, 지금까지의 이력으로 부족하다면, 능력에 대한 의심이 있다면 그건 내가 부족한 거라, 그러니 그런 일에 나를 끼워 넣으려고 애쓰거나 증명하려고 하지 않겠다고.

 

직이 떨어진 자리에 업이 남는다. 나의 업, 나의 일, 나는 내 일을 한다. 그게 뭔지 정하지 않아도, 내가 한 일들이 쌓이면 알게 되겠지. 답답하게 빙 둘러 가는 길을 가더라도, 재미있게 즐겁게, 그렇게 살 수 있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퇴사하고 1달이 지났다.

막판에 겁먹고 망설이다 어영부영 2개월을 더 다닌 게 아까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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